이민구 운동이 한창이던 1969년, 프레드 암툰이라는 블랙 팬서당의 일리노이 지부장과 관련된 영화에 대해 말씀드렸었는데요. 그래서 오늘은 이 블랙 팬서당, 즉 흑표당에 대해서 보다 깊이 있는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이 흑표당은 1966년 10월 15일,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에서 설립되었습니다. 이 단체를 설립한 인물들은 젊은 혁명가인 마비스와 휴이 루트니라는 인물들로, 그들의 열정과 의지가 이 단체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당시 미국 전역에서 민권 운동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고, 흑인 차별이라는 문제는 남부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국적으로 심각한 상황이었습니다. 특히 경찰에 의한 폭력적인 진압과 무차별적인 체포, 심지어 흑인들이 사망하는 사건이 잇따르면서, "흑인 목숨은 우리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강력한 메시지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시작된 것이 바로 흑표당입니다. 초기에는 자경단 같은 개념으로 출발했지만, 그들의 활동은 점차적으로 사회 전반으로 확대되었습니다. 흑표당이 가지고 있는 플랫폼 강령에는 약 10가지 포인트가 포함되어 있으며, 이들은 흑인의 자유를 추구하는 것을 전반적인 목표로 삼고 있었습니다. 특히 이들은 커뮤니티 프로그램을 통해 아동들에게 무료 급식을 제공하거나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등의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행하여 지역사회의 위생 시설을 보완하는 데도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이처럼 흑표당은 단순히 정치적 이념을 주장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지역 사회에 기여하는 활동에 힘쓰며 커뮤니티 활동에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이들의 특징 중 하나는 연대를 통해 세력을 확장했다는 점입니다. 흑표당이 처음 시작했을 때는 흑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지만, 그들의 이념은 마르크스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등으로 점차 경도되어 갔습니다. 이로 인해 비슷한 이념을 가진 집단들과 손잡는 일이 잦아졌고, 예를 들어 PSN 프리덤 파티라는 완전히 좌파 성향의 정치 단체와 연대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연대는 흑표당의 활동을 더욱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그들의 영향력을 넓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또한, 이 흑표당을 지지하는 백인들의 모임인 화이트 팬서당도 존재했으며, 이들은 흑표당의 활동을 지지하고 도움을 주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다양한 집단과의 연대는 흑표당이 단순한 인종운동 단체를 넘어, 보다 폭넓은 사회 변화를 추구하는 중요한 조직으로 자리 잡게 해주었습니다. 특히 멕시코계 미국인들과의 연대는 이민자 및 소수 인종의 권리를 위한 연합의 중요한 예로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로 브라운 벨츠와 손을 잡고, 서로의 경험과 고민을 공유하며, 다양한 사회적 문제에 대해 공동으로 대응하기 위해 힘을 모았습니다. 영화에서도 이와 같은 연대의 모습이 잘 드러나며, 특히 페르도리코 미국인들이 결성한 영 로즈와의 협력은 이러한 연대의 구체적인 사례를 보여줍니다. 이러한 연대는 단순히 미국 내의 소수 인종들 간의 협력에 그치지 않고, 국제적인 차원으로도 확장되었습니다. 1960년대에는 제3세계 국가들에서 반식민지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으며, 이는 의식적으로나 비의식적으로 미국 내의 소수 인종 운동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당시 아프리카에서는 특히 많은 민족 해방 운동이 일어났고, 1960년
한 해에만 17개의 아프리카 국가가 독립을 쟁취한 것은 그 자체로도 큰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이러한 아프리카 국가들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 중 하나가 바로 프란츠 파농입니다. 그의 저작과 사상은 흑표당을 포함한 여러 운동에 깊은 영감을 주었고, 이러한 국제적 맥락 속에서 흑표당의 활동도 더욱 활발해졌습니다. 특히 흑표당의 핵심 인물 중 한 명인 애드리안 지크 리버는 알제리 민족 해방 전선과 연대를 맺으면서 그들의 활동을 국제적으로 확장했습니다. 이들은 공식적인 연대를 통해 당시 공산주의 국가들?중국, 소련, 북베트남 등?과의 교류를 통해 서로의 경험을 나누고, 지지 기반을 확대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국제적 연대는 냉전 시기였던 만큼 미국 연방 정부에서는 상당히 위험한 상황으로 간주되었습니다. FBI는 이러한 움직임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고, 당시 국장인 J. 에드거 후버는 인종 차별주의자로 알려져 있을 만큼 흑표당의 활동을 억압하기 위한 여러 조치를 취했습니다. FBI의 COINTELPRO 프로그램은 공산주의자들을 색출하기 위한 비밀 작전으로, 흑표당과 흑인 민권 운동의 지도자들에게까지 그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이 프로그램의 목표 중 하나는 '흑인 메시아'의 등장을 사전에 차단하는 것이었으며, 그 후보 중 한 명으로 프레드 햄튼이 지목되었습니다. FBI는 이러한 움직임을 통해 흑표당의 활동을 무력화시키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흑표당의 정신과 활동은 단순히 외부의 압박에 의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내부적으로도 강한 결속력을 바탕으로 다양한 사회적 이슈에 대응하며, 그들의 사상과 신념은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흑표당의 몰락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 원인을 단순히 외부 압박으로만 설명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물론 FBI의 압박이 중요한 단초를 제공했지만, 그 외에도 다양한 내부 문제들이 존재했습니다. 흑표당은 무장을 하고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기도 했고, 이로 인해 여러 명이 목숨을 잃는 안타까운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러한 충돌은 단순한 무장 저항이 아니라, 그들이 처한 사회적, 정치적 압박을 반영하는 상징적인 사건들이었습니다. 영화에서도 잠시 언급되지만, 알렉스 웨클리라는 인물이 FBI의 스파이로 지목되어 지독하게 고문당하고 살해되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 사건은 흑표당의 내부에서 발생한 배신과 외부의 압박이 어떻게 결합되어 조직을 약화시키는지를 보여줍니다. 물론 영화에서는 이러한 사건들이 FBI의 공작으로 설명되고 있으며, 이는 흑표당에 대한 대중의 인식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는 지도층의 내분과 분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휴이 뉴턴의 전행이 큰 문제로 지적되었죠. 그는 당의 창립자이자 중요한 리더였으나, 그의 개인적인 문제들이 조직의 통합성을 해치게 되었습니다. 밥 애그리, 리처드 루지크, 일레인 브라운 같은 주요 인물들이 흑표당에서 쫓겨나거나 탈퇴하면서 조직이 몰락하게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이러한 인물들의 이탈은 단순한 개인적 갈등을 넘어서, 흑표당이 지향하던 정치적 목표와 이상에 대한 심각한 위기를 초래했습니다. 휴이 뉴턴은 마약과 알코올 중독 문제를 앓고 있었으며, 오클랜드의 갱단으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문제들로 인해 조직의 결속력이 약화되었고, 결국 그는 블랙 게릴라 셈이라는 갱단의 멤버에게 살해당하고 말았습니다. 그의 죽음은 흑표당의 종말을 예고하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여겨졌으며, 흑표당은 1982년에 막을 내리게 됩니다. 그렇다면 흑표당의 멤버들은 이후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흥미로운 사례 중 하나는 리처드 클립퍼입니다. 그는 흑표당에서 나와 여러 가지 종교적 경험을 쌓았고, 기독교 외에도 다양한 종교에 귀의했습니다. 그 중 하나가 통일교였고, 결국 그는 몰몬교 신자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그가 과거의 삶을 어떻게 성찰하고, 새로운 정체성을 찾으려 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후 그는 매우 열렬한 공화당원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는 그가 정치적 신념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잘 나타냅니다. 또한, 밥 애그리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여러 권의 책을 출간했습니다. 그의 저서들은 흑표당 당시의 경험을 담고 있으며, 그가 요리책을 내기도 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그는 배 낸 죄리라는 아이스크림의 모델로도 활동했는데, 그 모습은 이전의 무시무시한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포근한 아저씨 같은 모습으로 광고에 등장했습니다. 이러한 변신은 그가 과거의 삶을 어떻게 극복하고, 새로운 삶을 추구하려 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흑표당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갈라지는 편입니다. 그들의 활동과 사상은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었지만, 동시에 그들의 방법론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합니다. 이러한 복잡한 평가는 흑표당의 역사와 그들이 남긴 유산에 대한 깊은 성찰을 요구합니다 실제로 흑표당은 그렇게 주목할 만한 집단이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매스미디어가 흑표당에 지나치게 관심을 기울여 과장되게 표현했다고 평가합니다. 당시 헐리우드 스타들이나 유명 셀럽들이 이들을 위해 펀드레이징을 해주기도 했는데, 이러한 방식으로SM용품 흑표당을 과대포장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저널리즘 작가인 터몰프는 흑표당을 '디카시'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본래의 의미보다 더 화려하고 장식적으로 포장된 이미지를 전달하려는 의도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즉, 흑표당의 활동이나 그들의 목표가 실제보다 훨씬 더 극적인 방식으로 보도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반면, 흑표당을 두고 흑인들이 처음으로 폭력의 수단을 들고 자신들의 자존심을 높이려는 의식 있는 운동으로 받아들이는 시각도 존재합니다. 특히 현재 아프리칸 아메리칸 커뮤니티에서는 이러한 인식이 많이 퍼져 있습니다. 흑표당은 단순히 정치적 집단이 아니라, 사회적 불평등에 맞서 싸우려는 강한 의지를 가진 집단으로 여겨집니다. 그들은 경찰의 폭력과 인종 차별에 맞서 싸우기 위해 무장한 채로 거리로 나섰고, 이러한 모습은 많은 흑인들에게 자아 정체성과 자존감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물론 흑표당은 결국 실패로 끝났지만, 그들은 큰 아메리칸 드림을 넘어서서 사회 운동을 시작하게 한 의미 있는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되기도 합니다. 이들은 단순히 정치적 혁신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고 이를 위해 행동에 나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흑표당과 마블 코믹스의 블랙 팬서는 얼마나 관계가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양쪽 모두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흑표당이 설립된 것은 1966년 10월이지만, 마블 코믹스의 블랙 팬서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66년 7월의 《판타스틱 포》 넘버 52에서였습니다. 따라서 마블 코믹스의 블랙 팬서가 흑표당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시기적으로 앞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두 현상이 서로 다른 시대적 배경에서 독립적으로 발전했다고 해서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흑표당의 아이디어는 이전부터 존재해왔고, 그 뿌리는 민권 운동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스토클리 카마이클이라는 유명한 민권 운동가는 알라바마주 라운드 카운티에서 흑인들의 유권자 등록 운동을 조직했습니다. 그가 설립한 지역 정당은 '라우스 카운티 프리덤 오르가니제이션(LCFO)'이라고 불렸습니다. 당시 알라바마는 문맹률이 매우 높았는데, 이러한 정당들은 흑인 유권자들의 정치적 인식을 높이고, 그들의 권리를 옹호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흑표당 역시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고 자존감을 높이기 위한 방법으로 무장한 저항을 선택하게 된 것입니다. 클릭하 마이클이 선택한 상징이 바로 블랙 팬서입니다. 이 블랙 팬서는 사실 라우스 카운티 자유 조직(LCFO)에서 먼저 사용하던 상징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블랙 팬서를 선택했을까요? 이 선택의 배경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일설에 따르면, 흑인 대학인 클락 애틀랜타 대학교의 상징이 블랙 팬서였다고 합니다. 이 대학은 미국 내에서 중요한 교육기관으로, 흑인 커뮤니티의 지식과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습니다. 블랙 팬서는 "먼저 공격하지 않는다. 그러나 공격을 받았을 때는 반격을 하고 끝장을 본다"는 의미를 담고 있어, 이러한 선택이 이뤄졌다고 합니다. 이는 단순히 상징적인 의미를 넘어서서, 흑인 사회의 저항과 단결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줍니다. 어쨌든 LCFO의 상징으로서 블랙 팬서는 상당히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무엇보다도 강렬한 이미지 덕분에 언론에서 보도할 때 이들이 '블랙 팬서당'이라고 불리게 된 배경이기도 합니다. 1966년, 휴이 뉴턴이 자신들의 정당을 창당할 때 이 블랙 팬서를 가져온 것이죠. 이는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흑인 인권을 위한 투쟁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흑표당, 즉 블랙 팬서당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경찰의 폭력과 불평등한 대우에 맞서 싸우며, 사회적 정의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그렇다면 마블 코믹스는 이와 어떻게 연결될까요? 사실 마블 코믹스는 당시 DC 코믹스와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쫓아가는 입장이었습니다. DC 코믹스는 그야말로 제국과 같았고, 그린 랜턴, 배트맨, 슈퍼맨 등 여러 유명 캐릭터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마블 코믹스는 획기적이고 혁신적인 캐릭터와 스토리를 발굴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흑인 히어로를 만들기로 결정하게 되었고, 그 결과 탄생한 것이 블랙 팬서라는 캐릭터입니다. 이 캐릭터는 단순한 슈퍼히어로가 아니라,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한 독특한 세계관과 문화적 요소들이 결합되어 있습니다. 마블에서 처음 등장한 블랙 팬서는 1966년 7월의 《판타스틱 포》 넘버 52에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초기에는 블랙 팬서가 아닌 '커버(Ka-Zar)'라는 캐릭터가 먼저 구상되었습니다. 이 캐릭터는 알록달록한 옷을 입고 있고, 얼굴은 친근한 아저씨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블랙 팬서를 생각할 때 느끼는 비장미나 멋짐과는 확연히 다른 이미지였습니다. 당시 마블 코믹스의 작가들, 예를 들어 스탠 리나 잭 커비는 이 캐릭터의 매력을 잘 살리지 못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캐릭터는 몇 개월 동안 묵혀 두게 되었고, 그 사이에 블랙 팬서의 개념이 더욱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작가들은 블랙 팬서가 지닌 힘과 지혜, 그리고 중대한 사회적 메시지를 잘 활용하기 위해 캐릭터를 재구성하게 됩니다. 결국, 마블 코믹스는 블랙 팬서를 통해 흑인 히어로를 주류 문화에 등장시키는 데 성공했으며, 이는 흑표당과 같은 역사적 맥락에서 흑인 사회의 권리와 자존감을 높이는 데 기여하게 됩니다. 이처럼 블랙 팬서라는 캐릭터는 단순한 슈퍼히어로를 넘어,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중요한 상징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블랙 팬서는 영화화되면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이는 흑인 커뮤니티의 문화와 정체성을 재조명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캐릭터는 단순한 오락을 넘어서, 사회적 대화와 변화의 촉매로 작용하고 있습니다.